SF 영화에서 복제 인간이 등장하면 보통 정체성 혼란이나 실존적 고뇌를 다루기 마련인데, 봉준호 감독은 왜 그 설정을 그냥 풍자 도구로만 썼을까요? 저는 '미키 17'을 보고 나서 이 질문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1억 5천만 달러를 투입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데, 정작 영화 안에선 한국 영화 특유의 냉소적 계급 비판이 전면에 깔려 있더라고요. 로튼 토마토 88%, 메타스코어 75점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저는 솔직히 기대했던 방향과는 좀 달라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복제인간 설정보다 강한 계급 풍자
영화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지구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자 인류는 우주 식민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주인공 미키 반즈는 빚을 피해 '익스펜더블(Expendable)'이라는 소모품 인력에 지원합니다. 여기서 익스펜더블이란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어 죽으면 즉시 복제되는 일회용 노동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기업이나 조직이 인간을 그냥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쓴다는 설정이죠.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미키가 죽는 장면들의 무례함이었습니다. 복제 과정에서 케이블이 발에 걸리고, 새로 프린트된 신체가 선반에서 그냥 떨어지는 모습은 거의 공장 컨베이어 벨트 수준이었어요. 이런 연출은 노동자를 인격체가 아닌 생산 수단으로만 보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메타포입니다. 영화 속 우주선을 통치하는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은 전직 국회의원 출신의 무능한 독재자로, "우월한 인간"이니 "순백의 행성"이니 하는 공허한 구호만 외칩니다.
미키가 죽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죽는 기분이 어때?"라고 아무렇지 않게 묻는 장면은 정말 소름 돋았습니다. 그 무감각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어요. 이건 단순히 SF 설정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 특정 계층의 고통을 구경거리로만 소비하는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할리우드 자본으로 찍은 한국식 각본
봉준호 감독은 에드워드 애쉬턴의 원작 '미키 세븐'을 상당 부분 각색했습니다. 원작에서는 복제 인간의 정체성 문제가 중심이었지만, 영화에서는 그 부분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계급 전복 서사에 집중했습니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멀티플(Multiple)이 되는 설정, 즉 복제자 복수 공존 상태가 되면서 둘이 협력해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구조죠.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미키 캐릭터는 묘하게 알 듯 모를 듯한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순한 맛 미키 17과 매운맛 미키 18의 성격 차이는 크지 않지만, 패틴슨 특유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로 두 캐릭터를 구분해 냈더라고요. 제 경험상 이런 1인 2역 연기는 자칫 과장되기 쉬운데, 패트슨은 오히려 절제된 연기로 캐릭터의 복합성을 잘 살렸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SF라는 할리우드 장르 안에 한국 영화 특유의 디테일을 집어넣었습니다. 캐릭터들의 대사 워딩이나 상황 설정이 명백히 한국 각본 스타일이에요. 예를 들어 케네스 마샬이 "가임기 여성이 죽었다"며 호들갑을 떨고, 여성 인물에게 "우성 인자로서 인류 번성에 기여하라"는 망언을 내뱉는 장면은 봉준호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직설적 풍자입니다.
시각적으로도 캐서린 조지가 만든 의상은 단색 노동복 스타일이고, 피오나 크롬비의 우주선 세트는 영락없는 탄광 같았습니다. 이런 디자인 선택은 우주라는 미래적 배경에서도 결국 노동 계급의 착취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강화합니다(출처: 미국영화협회).
기대와 다른 방향, 그래도 봉준호다운 영화
솔직히 저는 이 영화가 복제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깊이 파고들 거라 기대했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죽음이 일상화된 존재의 정체성은 뭘까?" 같은 철학적 질문을 기대했거든요.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독재자 풍자와 계급 전복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뭐가 나와도 결국 계층 비판으로 수렴되는 느낌이었어요.
캐릭터들도 풍자를 위해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만든 느낌이 있었습니다. 케네스 마샬은 거의 희화화 수준의 멍청한 독재자고, 그의 배우자 일파(토니 콜레트)는 사치와 허영에만 빠진 장식품이었죠. 이런 설정이 코미디적으로는 재밌지만,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은 약했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1억 5천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할리우드는 리스크를 극도로 기피하며 속편만 양산하는데, 이런 독창적 시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거든요. 만약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할리우드는 앞으로 이런 실험적 작품을 더 꺼릴 겁니다(출처: 박스오피스모조).
미키 17은 분명 봉준호 감독의 색깔이 강하게 묻어나는 영화입니다. 기생충 이후 그가 할리우드에서 어떤 작품을 만들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급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를 내놨더라고요. SF 설정의 잠재력을 다 활용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로버트 패틴슨과 봉준호의 조합에서 나온 특유의 냉소적 유머는 충분히 재밌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대와 달라서 당황스러웠지만, 이것도 봉준호가 아니면 못 만들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