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깎던 손이 멈췄다. 화면 속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거실 소파에 앉아 사과를 깎으며 무심코 틀어놓았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중반부 장면이었다. 주인공의 팔뚝에 적힌 타임리프 잔여 횟수가 의미 없이 거칠게 줄어들다가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는 그 순간, 과도 칼날을 쥔 내 손가락이 미동도 없이 얼어붙었다. 그저 청량하고 상큼한 시골 마을의 청춘 로맨스물인 줄로만 알았던 화면 너머의 세계가, 갑자기 내 지루하고 피곤한 일상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집어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후기, 낭만인 줄 알았는데 뒤통수어릴 적 기억 속의 이 영화는 그저 매미 소리 우렁찬 여름날, 청량한 하늘 아래서 주인공 마코토가 풋풋한 사랑과 장난으로 시간을 마음껏..
긴장 끊길까 봐 일부러 밤 10시 넘은 심야 상영 골랐다. 낮 시간에 들어가서 관객들의 사소한 들썩임이나 소음, 휴대폰 들여다보는 반짝임 때문에 영화가 가진 팽팽한 밀도와 몰입감이 깨지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오롯이 나 혼자 어둠 속에 갇혀 스크린이 던져주는 지독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싶었고, 그 선택은 상영관에 들어서자마자 완벽하게 적중했다. 주위의 그 어떤 방해 요소도 없이 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영화의 숨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이 나에게는 가장 절실했던 순간이었다. 데드락 심야 상영, 밤 10시를 고른 이유긴장 끊길까 봐 일부러 밤 10시 넘은 심야 상영 골랐다. 평소 고도의 몰입감이 요구되는 스릴러 장르를 볼 때면 관객들의 핸드폰 반짝임이나 팝콘 씹는 소리, 옆 ..
팝콘 집으려던 손이 소피 손 장면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떤 장면이었냐면, 마법에 걸려 할머니가 된 소피가 거대한 성 안에서 자신의 서툴고 주름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묵묵히 버텨내는 순간이었다. 팝콘 상자 안으로 손을 넣어 한 움큼 집어 올리려던 내 오른손이 스크린 속 그 정적과 손에 담긴 묵직한 정서에 사로잡혀 공중에서 미동도 없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리뷰, 영화 시작 20분 만에 손이 굳었다팝콘 집으려던 손이 소피 손 장면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영화 시작 20~25분쯤 흘렀을까, 불과 10~15초 남짓 이어지던 소피의 손 연출 장면에서 내 오른손은 팝콘 상자 위에 올려진 채 뻐근하게 굳어 버렸다. 예전에는 단순히 예쁜 그림체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나 하울이라는 잘생긴 캐릭..
현관 비밀번호 앞 1~2분 석상처럼 굳어 있었음. 심야 영화로 '곡성'을 다 보고 차가운 밤길을 지나 겨우 집에 도착했는데, 익숙한 내 집 현관문 도어록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손가락이 미동도 없이 멈춰 서 버렸다. 어두컴컴한 복도 한복판에서 디지털 도어록의 푸르스름한 숫자를 올려다보는데,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이성을 송두리째 마비시키던 기괴한 의심과 기이한 잔상이 복도 어둠 구석진 곳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차마 손가락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곡성 오해, 점프스케어 공포영화가 아니다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작품을 흔히 나오는 잔인한 점프스케어 슬래셔나 엑소시즘 빙의물 공포영화로 대충 오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징그러운 귀신이 툭 튀어나오거나, 피가 사방으로 튀는 일회성 자극으로 관..
궁정동 안가 평면도를 확대해 복도 길이를 가늠하다 세 정거장 지나쳤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다 보고 나와 귀갓길 지하철에 몸을 실었지만, 머릿속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권력의 서늘함과 처절한 몰락의 잔상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1979년 당시 사건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의 도면 자료를 찾아 들여다보며 총성이 울려 퍼지던 그 어둡고 짧은 복도의 길이를 손가락으로 확대해 가며 가늠해 보느라, 내가 내려야 할 정차역 안내 방송조차 까맣게 잊은 채 깊은 몰입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 관람, 세 정거장을 지나친 밤궁정동 안가 평면도를 확대해 복도 길이를 가늠하다 세 정거장 지나쳤다. 컴컴한 지하철 차창 밖으로 터널의 어둠이 스쳐 지나는 동안 내 시선은 오직 스마트폰 화면 속 어..
이어폰을 꽂는 행위가 영화가 남긴 정적을 더럽히는 것 같아서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영화관을 나와 익숙하게 주머니 속 이어폰 케이스를 집어 들고 귀에 꽂으려던 순간, 내 손가락이 공중에서 스르륵 멈춰 섰다. 3시간 동안 스크린을 채우던 낮고 정갈한 자동차 엔진 소리와 인물들 사이의 묵직한 침묵의 잔상이 가슴속에 여전히 넘쳐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 인위적인 음악이나 자극적인 소리를 덮어씌우는 행동 자체가 영화가 내게 남겨준 고요한 울림을 훼손하는 비겁한 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라이브 마이카, 단 1초도 귀를 심심하게 못 두던 사람사실 나는 일상 속에서 단 1초도 내 귀를 심심하게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는 지독하게 산만한 사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직전까지, 심지어 집 앞 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