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버튼 안 누르고 있으면 저 독립군이 수풀 속에 안전하게 살아있을 것만 같은 기괴한 착각까지 들었습니다. 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모니터를 켜놓고 독립군 영화를 보다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일촉즉발의 절체절명 순간에 나도 모르게 스페이스바를 눌러 화면을 정지시켜 버렸습니다. 정적 속에서 화면을 노려보는데, 내가 다시 화면을 재생시키는 순간 저 인물이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은 기묘한 두려움과 압박감이 가슴을 꽉 짓눌렀습니다. 독립군 영화 일시정지, 재생 버튼 못 누른 1분화면을 멈춰두고 거의 1분 동안 일시정지 상태로 픽셀 속에 멈춰있는 독립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흙먼지와 핏자국이 범벅이 된 채 숨을 헐떡이던 모습 그대로 멈춰있는 그의 눈빛을 보는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그 카톡 다시 읽다가 얼굴이 확 화끈거렸다. 집에서 영화 '나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보다가 주인공이 난처한 상황을 피하려고 거짓 핑계를 대는 장면이 나왔는데, 왠지 모르게 남 일 같지 않은 찝찝한 기분이 들어 홀린 듯이 휴대폰 카톡 검색창을 열어 옛날 대화록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묻어두었던 특정 단어를 검색해 과거의 대화창을 열어젖힌 순간, 잊고 살았던 내 민망하고 이기적이었던 거짓말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1. 나의 아픈 사랑이야기 속 꾀병, 내 카톡함에도 있었다영화 속 주인공이 서툴게 꾀병을 부리며 위기를 넘기려 하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피식 웃으며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5년 전의 어떤 하루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톡 검색창에..
팝콘 와구와구 먹던 손이 공중에 딱 멈춰서 입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더라고요. 그날 밤 11시, 평소에 귀신 따위는 하나도 안 무섭다고 유세를 떨던 친구랑 같이 극장에 들어가서 봤던 영화 강령 얘기입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녀석이 상영관 어둠 속에서 정색한 채 굳어있는 모습을 보는데, 이건 보통 수준의 공포 영화가 아니라는 게 몸으로 단번에 느껴졌습니다. 1. 강령 관람 전, 팝콘 제일 큰 거 들고 입장영화표를 끊고 들어가기 전만 해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관객이었습니다. 밤 11시 마지막 회차 영화라 상영관 안이 썰렁하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우리는 매점에서 팝콘 제일 큰 사이즈와 시원한 음료를 당당하게 들고 입장했습니다. 극장 로비에서 티켓을 출력하면서 내가 친구한테 요즘 나오는 공포 영화..
불합격 37개 폴더 이름을 '탈출'로 바꿨다. 어느 날 밤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마우스 우클릭을 눌렀다. 그전까지는 회사 이름과 제출 날짜, 그리고 뒤에 '불합격'이라는 딱지가 차갑게 붙어있던 폴더들이었다. 서류 탈락 통보를 받을 때마다 가슴에 비수를 찌르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폴더명을 '탈출 1', '탈출 2'로 이름을 바꿔버린 순간, 이상하게도 바닥을 치던 마음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1. 쇼생크 탈출, 취업 37번 탈락 폴더 이름을 바꾼 날서류를 접수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내 하루 전체가 인질로 잡히는 기분이었다. 지원 완료 버튼을 누르고 난 뒤부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새로고침(F5) 키를 연신 눌러대며 이메일함과 합격 조회 창을 들여다봤다.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스마트폰 진동..
그날 밤 친구가 얼음컵 물방울 쓱 닦더니 '우리도 벌써 열 번째 여름'이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심야 영화로 '우리의 열 번째 여름'을 같이 보고 나와서,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캔맥주와 얼음컵을 놓아두고 앉아있던 때에 벌어진 일이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 동안 둘 다 말이 없다가, 테이블 위에 흥건하게 고인 맺힌 물방울을 친구가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쓱 닦아내며 던진 그 한마디가 내 가슴속 깊은 곳을 아주 묵직하게 건드렸다.우리의 열 번째 여름, 연애 소설 아닌 10년짜리 인생 다큐누군가 이 영화를 두고 '달달한 청춘 로맨스 여름 영화지?' 하고 물어본다면, 이 영화를 실제로 본 사람들은 다들 억울해하면서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반박하는 영화다. 겉보기에는 새파란 여름날의 푸르른 배경과 청춘 남녀의..
청소 스태프 들어올 때까지 자리 못 일어났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의 마지막 글자가 올라가고 상영관 조명이 환하게 켜질 때까지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밀대걸레를 든 청소 스태프가 들어와서 나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들어올 때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가 끝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여전히 그 깊은 바닷속에 짓눌러둔 채 방치해 두고 나온 기분이었다. 헤어질 결심 5회 차, 볼 때마다 달랐다영화관에서 2번 보고, VOD가 나오자마자 3번을 더 결제해서 총 5번을 봤다. 보통 같은 영화를 5번이나 보면 장면이나 대사가 익숙해져서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볼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레이어가 껍질 벗겨지듯 드러나며 달랐다. 1회 차엔 엔딩의 묵직한 충격 때문에 청소 스태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