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영화

남산의 부장들 후기, 지하철 세 정거장을 지나친 밤

lottohouse2026 2026. 8. 17. 08:03

목차


    궁정동 안가 평면도를 확대해 복도 길이를 가늠하다 세 정거장 지나쳤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다 보고 나와 귀갓길 지하철에 몸을 실었지만, 머릿속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권력의 서늘함과 처절한 몰락의 잔상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1979년 당시 사건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의 도면 자료를 찾아 들여다보며 총성이 울려 퍼지던 그 어둡고 짧은 복도의 길이를 손가락으로 확대해 가며 가늠해 보느라, 내가 내려야 할 정차역 안내 방송조차 까맣게 잊은 채 깊은 몰입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관련 포스터
    영화 남산의 부장들 관련 포스터

    남산의 부장들 관람, 세 정거장을 지나친 밤

    궁정동 안가 평면도를 확대해 복도 길이를 가늠하다 세 정거장 지나쳤다. 컴컴한 지하철 차창 밖으로 터널의 어둠이 스쳐 지나는 동안 내 시선은 오직 스마트폰 화면 속 어두운 건물 도면에만 꽂혀 있었다. 도대체 그 좁고 막혀있는 공간에서 어떻게 그런 엄청난 역사적 비극과 권력자들의 마지막 피비린내 나는 폭주가 벌어질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면을 두 손가락으로 크게 늘려가며 총성이 울리던 방과 2층 복도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 인물들이 도망치며 피를 흘리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보니 차 안의 소음이나 사람들의 들썩임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도면을 들여다보며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다가,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생경하고 낯선 역 스크린도어가 닫히는 걸 보고서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미 내가 내렸어야 할 목적지 역을 까마득하게 지나쳐 세 정거장이나 더 가버린 상태였다. 당황해서 서둘러 지하철에서 내렸지만, 텅 빈 승강장의 차가운 정적마저 마치 영화 속 그 기묘하고 쓸쓸했던 궁정동 안가의 밤공기처럼 서늘하게 내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목적지를 지나쳐 반대편 승강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내 머릿속은 1979년 10월의 그 컴컴하고 서늘했던 복도 한복판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후기, 감독이 실제 역사보다 순화했다는 허탈함

    반대편 지하철을 기다리며 승강장 의자에 앉아 관련 역사적 기록들과 당시 사건의 재판 기록 자료들을 추가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보여준 그 차갑고도 기괴했던 연출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참혹하고 민낯 그대로의 사실들에 비하면 감독이 오히려 엄청나게 톤을 낮추고 실제 역사보다 순화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지독한 허탈함과 소름이 동시에 밀려왔다. 화면에 담긴 영화적 긴장감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현실의 기록들은 그보다 훨씬 더 조잡하고 통제 불능이었으며 참담할 정도로 생생했다. 픽션보다 더 영화 같았던 참혹한 현실의 무게를 직면하자 지하철 승강장의 차가운 바람이 뼈마디를 파고드는 듯했다. 승강장 맞은편 어두운 차창 유리창에 멍하니 비친 내 지친 모습이 보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1979년 그 거대한 권력의 폭주와 비극을 저지하지 못한 채 그저 멀리서 손 놓고 바라만 보던 수많은 방관자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 같아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소비하고 넘기던 기록들 뒤편에는, 이토록 비참하고도 서늘한 인간의 욕망과 비극이 적나라하게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산의 부장들, 지질한 밥그릇 싸움을 보여준 영화

    흔히 정치나 권력을 다룬 영화라고 하면 대단히 치밀한 지략 싸움이나 거창한 대의명분이 부딪히는 웅장한 서사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 가슴을 가장 매섭게 파고들었던 이유는, 겉으로는 최고급 맞춤 슈트를 입고 서슬 퍼런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이라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본질은 처절하고 지질한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나 투명하고 냉정하게 까발려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직 각자의 안위와 각하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는 비겁한 충성 경쟁, 그리고 서로를 짓밟고 일어서려는 차가운 이기심만이 그 화려한 정장 밑바닥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거창한 역사적 신념이나 나라를 위한 결단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직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모함하고 눈치를 보는 지질한 권력욕의 덩어리들만 남아있었다. 슈트를 차려입은 권력자들의 그 초라하고 추악한 민낯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조직과 권력의 속성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는 씁쓸한 자각이 밀려왔다. 멋진 슈트를 입고 있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처절하고 지질한 밥그릇 싸움.

    멋진 슈트를 입고 있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처절하고 지질한 밥그릇 싸움이었습니다. 거창한 명분이나 대의로 포장된 권력의 껍데기 뒤에 숨겨진 그 초라한 인간의 욕망을 똑똑히 보았기에, 나는 앞으로 세상의 화려한 포장지나 거창한 말에 결코 속지 않고 그 알맹이에 담긴 진짜 민낯을 냉정하게 직시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