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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동주 감상, '오늘 밤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구나

lottohouse2026 2026. 8. 14. 09:36

목차


    모자 눌러쓰고 빠르게 나와 찬 바람맞으며 40분 넘게 걸어왔다. 엔딩 크레디트가 어두운 스크린 위로 쓸쓸하게 올라갈 때부터 가슴속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울컥함과 먹먹함 때문에 차마 상영관 안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관객들의 시선을 피해 눌러쓴 모자챙을 더 깊숙이 눌러쓰고 극장 문을 차고 나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차가운 밤공기를 그대로 맞으며 컴컴한 밤길을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40분이 넘는 시간을 찬 바람 속에서 걸어오는 동안 나 가슴속을 채운 것은 영화의 여운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무거운 부끄러움이었다.

     

    영화 동주 관련 포스터
    영화 동주 관련 포스터

    영화 동주, 모자 눌러쓰고 40분 걸어온 밤

    모자 눌러쓰고 빠르게 나와 찬 바람맞으며 40분 넘게 걸어왔다. 아스팔트 바닥 위로 길게 늘어진 나 보도블록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영화 속 윤동주 시인이 평생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 지독하고 고결한 부끄러움이 마치 나 어깨 위로 턱 하고 옮겨 앉은 것만 같았다. 암울했던 시대의 비극 앞에서도 시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며 가슴을 쥐어짜던 그의 순수한 영혼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눈앞의 사소한 불이익이나 손해에 안절부절못하고, 세상의 불의나 타인의 아픔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나 안위와 편안함만을 챙기며 살아온 얄팍한 일상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찬 바람이 볼을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갈 때마다, 핑계와 타협으로 점철된 내 삶의 보잘것없는 단면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기분이었다. 모자 밑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밤길을 꿋꿋하게 걸었지만, 가슴에 얹힌 묵직한 부끄러움의 무게 때문에 발걸음은 갈수록 무겁고 서늘하게 가라앉기만 했다. 내 안의 오만함과 이기심을 차가운 밤바람에 조금이라도 씻어내고 싶어서, 일부러 몸을 웅크린 채 집으로 향하는 길을 길게 돌아서 걸어왔다.

     

    스마트폰 대신 3년 묵은 노트

    차가운 밤바람을 뚫고 40분 만에 집에 들어왔지만, 어깨에 걸쳐진 외투조차 벗지 않은 채 컴컴한 방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의미 없는 짧은 영상이나 단톡방 메시지를 쓸어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만큼은 빛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켜는 것조차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을 가볍게 덮어버리려는 나의 비겁하고 얄팍한 회피 행동처럼 느껴져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대신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2~3년 동안 먼지가 하얗게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오래된 노트 한 권과 손때 묻은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조용히 꺼내 들었다. 시대를 고민하고 자신의 영혼을 글에 담아내던 시인의 정직한 태도 앞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화면 뒤로 숨어버리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먼지를 손바닥으로 털어내고 바삭하게 말라 있던 오래된 노트를 펼쳤다. 조용한 방 안에서 모나미 볼펜 뚜껑을 틱 소리 나게 열고 빈 종이를 바라보는데, 세월의 때가 묻은 종이 위로 내 서툰 진심이라도 오롯이 적어 내려가지 않으면 가슴이 가빠서 숨을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종이가 팔 정도로, '오늘 밤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스마트폰의 차가운 빛 대신 책상 위 조그만 스탠드 불빛 아래서 볼펜을 꽉 쥐었다. 그리고 서걱거리는 노란 종이가 살짝 파일 정도로 악력을 주어 꾹꾹 눌러쓰기 시작했다. '오늘 밤,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한 줄의 문장이 종이 위로 선명하게 적혀 내려갔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글씨를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둔 지질함과 부끄러움을 뾰족한 볼펜 심으로 사정없이 긁어내는 기분이었다. 종이가 찢어질 듯 깊게 파인 글자 자국이라도 꾹 눌러 새겨놓아야만, 그날 밤 가슴을 사정없이 울렸던 거룩한 부끄러움이 일회성 감상이나 일시적인 눈물로 가볍게 휘발되어 버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나미 볼펜 심이 종이를 파고들며 나는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조용한 방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 한 문장을 온 힘을 다해 꾹꾹 눌러 적어 내려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가쁜 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깊숙이 앉을 수 있었다. 가슴속을 가득 채우던 부끄러움이 마침내 선명한 글자 자국이 되어 종이 위에 묵직하게 정착한 순간이었다.

    깊게 파인 글자 자국이라도 남겨야 부끄러움이 일회성으로 휘발 안 될 것 같았다. 그 밤이 지나고 몇 날 며칠이 흐른 지금도 나는 책상 위 오래된 노트를 가끔 펴보며 내 손 끝으로 새겨 넣은 그 문장을 가만히 쓸어보곤 한다. 비록 세상은 여전히 각박하고 나는 하루하루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날 밤 종이 위로 눌러쓴 부끄러움의 자국만큼은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긴 채 조금은 더 정직하고 겸손한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